" 울산공업센터 "

울산포스트 | 기사입력 2021/03/10 [11:33]

" 울산공업센터 "

울산포스트 | 입력 : 2021/03/10 [11:33]

 울산 큰애기

 

1. 맑은 하늘에 검은 연기가 뒤 덮이는 날

종수는 서울에서 한양공대를 졸업하자 말자 이제야 고향 울산에 가서 공단건설에 참여 할 꿈을 이루게 되었다고 충만한 기쁨에 젖어 동대문 경부고속터미널에서 버스에 몸을 실었다. 5시간 경부고속도로를 내려오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지난 10년 서울에서 보낸 고학시절의 고달픔과 아름다웠던 청춘의 시절을 회상하며 그 예날 중학생 시절에 품었던 울산공단 건설의 주역이 되겠다며 중앙선 열차를 타고 상경했을 때의 꿈을 이제야 실현시킬 수가 있겠구나 하고 스스로를 뿌듯한 자부심고 함께 가슴 깊숙이 새로운 각오를 다짐하며 크게 심호흡을 한다.

 

생각해 보니 아득한 지금은 옛날 일 같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리던 날 1962년 중학생 시절이 생각난다. 196223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은 울산 앞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납도 마을을 찾아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축사를 했다.

“5000년 빈곤의 역사와 보릿고개를 물리치고 신라의 번성을 되찾고 민족 숙원의 부귀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신공업도시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

울산은 이 기공식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공업도시로 성장했고

우리의 십년은 서구의 백년이라며 밤 낮 없이 건설의 햄머 소리 더 높이 울리며 전국의 실업자 가난한 농민들도 새로운 일터를 찾아 울산으로 살기 좋고 인심 좋던 울산땅으로 몰려들며 거야말로 피땀을 흘리며 일하며 공장을 건설했다.

 

종수가 태어난 고향 울산은 지난 격변의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대표적인 도시 중의 하나이며 사실상 국가재건과 민족중흥을 일으킨 원동력이 된 상징적인 재건의 터전이다. 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1962년 그러니까 종수가 중학교 3학년 때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첫 번째 사업으로 추진 된 역사적인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이 열렸다.

제일중학교 1000여명의 학생들이 울산 읍네에서부터 3열종대로 줄을 지어 이십 리도 넘는 거리를 걸어갔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송요찬 내각수반까지 전 각료가 참석한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납도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장,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이곳이 바로 울산공단이 건설되는 시발점이었다. 그 후 이 자리에 '한국 공업입국 출발지 기념비'가 세워졌고 비문에는 지금도 "민족중흥의 초석이 된 이 곳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길이 보존하고자 기념비를 건립한다"고 새겨져있다.

기공식장에는 물론 남녀 중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당시 울산농고(지금은 공고)와 울산여고, 그리고 군인들과 지역유지, 농어민들까지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려고 식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종수는 "5000년 가난의 역사와 보릿고개도 없애고 신라의 번성을 되찾자"는 박의장의 의미심장한 축사를 듣고 기공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야음동 산길로 질러오면서 모처럼 울산에 하나 뿐인 야음화장터 구경도 하며 마치 멀리 소풍이라도 온 기분이었다매일 연기를 내뿜는 화장 막 높은 굴뚝에도 올라가 보기도 하다가 먼 길을 걸어오면서 도중에 간간히 쉬어가며 어느덧 피로도 잊고 저녁 무렵에야 집에 당도 할 수가 있었다. 종수는 이날 돌아오는 길에 한 가지 자신과의 굳은 약속을 하며 소년의 야망을 가슴 깊이 품었다오늘 본 기공식 장면과 국가 지도자들의 연설문을 다시 생각하며 스스로 미래의 비전과 포부로 삼아 이 다음에 크면 반드시 고향 울산공단을 건설하는 주인공이 되리라 굳게 결심했다.

 

이때 세운 종수의 포부대로 중학교를 졸업하자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굳이 울산이 아니 공업고등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유학을 결행한 것이다국민하교 6학년때 아버님을 여이고 달리 돈벌이 하는 사람도 없는데 어머님 홀로 농사를 지으며 부산공고에 공부시키기엔 힘이 부쳤다. 선친은 기골이 장대하고 일본말로 록샤쿠라 불릴 정도로 큰 키에 미남자로 사나이다운 기개와 통 큰 사업수완으로 젊은 시절부터 장사를 시작하여 울산지방의 특산물을로 인근 도시로 판매망의 범위를 넓히는 대상이 되어 큰돈을 벌고 많은 전답과 임야도 샀다. 그러나 농지개혁법이 발효되자 수많은 농지를 거의 다 소작농에게 넘기고 종내에는 겨우 손수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읍네 한복판의 전답 몇 마지기밖엔 없었다.

 

어느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오후에 울산 초등학교 건물 26학년 교실에서 공부를 하면서 병마에 시달리다 그 날 따라 몸이 더 편찮으신 집에 누어 계실 아버님 생각을 하며 눈이 자꾸만 창가로 가는데 저 교정 끝에 정문 쪽에서 언뜻 오랫동안 아버지 일는 돕는 총무 아저씨가 교정으로 올라오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차 올 것이 왔구나하는 충격과 함께 눈물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곧 교실로 찾아 온 아저씨는 담임선생님께 아버지의 운명 소식을 알리고 종수를 찾았다. 대충 가방을 챙기며 비속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 울부짖으면서 집으로 달려가든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 울산에는 공고가 없고 농고만 있어서 부득이 부산의 공고로 진학했는데 부산시 문현동과 범일동 산자락 하꼬방에서 자취도 했고 어떤 때는 울산에서 부산까지 무려 3시간30분이 소요되는 기차 통학도 했다.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면 집에서 30분가량을 부지런히 걸어서 울산역에 도착하면 바로 동해남부선 열차를 타고 콩나무 시루 같은 열차 칸에서 소란과 먼지 속에 시달리다  부산 범일역까지 가면 아침 8, 급히 역을 빠져나와 범내골 학교까지 달려가서 책가방을 풀면 9시 곧 수업이 시작 된다. 이런 피곤하고 지루한 통학시절을 보내면서 어느날 울산역 프랫폼에서 종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죽을 고비를 한 순간 맛보며 천신만고 끝에 벗어 날 수가 있었으니, 바로 열차가 정거장에 도착할 때쯤 대부분의 통학생들은 숙달 된 솜씨로 열차가 아직 멈추지도 않았는데 문손잡이를 잡고 사뿐히 멋있게 뛰어내린다. 매일 이런 멋진 모습들을 몇달째 지켜보면서 어느날인가 종수도 저들처럼 멋진 자세로 프랫폼에 안착하리라 하는 생각을 늘상 품어왔는데 그날 저녁에는 결국 일을 내고야 말았다. 벌써 앞 칸에서부터 통학생들이 하나씩 둘씩 나비처럼 잘도 뛰어내린다. 종수도 질세라 이제 한손엔 가방을 꽉 움켜쥔 채로 열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힘차게 뛰어내렸다.

 

그런데 아마도 '이 순간에서 영원'으로 갈 뻔한 순간이었음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것 같았다. 거대한 기차의 바퀴 속으로 빨려드는 자신을 붙들려고 발버둥 치던 순간을 어렴풋이 의식하면서 한사코 반대쪽 방향으로 프랫폼에 몸을 던지려고 발버둥 치며 결사적으로 버텼는데 잠시 후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식은땀을 흘리며 다행히 종수의 몸은 원하는 위치는 못 미쳐도 그 보다는 아슬아슬하게 열차 레일과는 조금 떨어진 안전 위치에 흡사 석고처럼 굳어진 듯 서 있었다. 주위사람들의 불안한 눈초리와 여객전무의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면서 이 아찔한 한 위기의 순간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여전히 책가방은 꼭 쥔 채 한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날따라 발걸음은 더욱 피곤에 지치고 무거웠다

 

물론 공업센터 기공식장에서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힘겹게 공고 건축과를 마친 후에도 이즈음 공고 졸업생에게 마당한 일자리도 구하기가 어려웠고 목표했던 학문에 끝도 내야겠기에 다시 동일계 전공 학과를 택해 끝내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어려운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감연히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주경야독하며 고학으로 시작 된 어려웠던 대학 생활도 몇 년 후 울산 읍네가 공업도시로 하나씩 둘씩 공장이 건설되고 한창 공업도시로 성장을 시작하면서 급격한 인구 증가와 주택난으로 울산의 논밭 땅 값이 들썩이기 시작했고 선친이 남긴 적잖은 땅마지기도 값이 올라 아주 일부만 처분을 해도 서울 유학자금에는 별 부족함이 없었다. 빨리 자신이 선택한 건축공학을 졸업하면 약속한 고향 땅으로 돌아가 울산공단을 건설해야지 하는 일념으로 그간의 어떤 유혹이나 난관도 극복해 나갈 수가 있었다. 사실 공고를 택한 후에 건축학을 공부하면서 곧 이것이 자신의 적성이 아님을 알았지만 당시 한국의 교육열풍은 이후의 영어 몰입교육 만큼이나 기술교육이 최상의 선택이었고 엔지니어가 최고의 미래 희망이며 인기 학과목이었으니 당시만 해도 가난하고 배고픈 나라에 굳이 적성 같은 것을 타령이나 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70년대 초 쯤 서울의 한양대, 건국대, 성균관대 등 이름난 큰 대학에도 야간부들이 많았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학구열도 높았거니와 주경야독하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이 되면 야간대학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한양공대 같이 공과 대학으로 명성이 있는 대학은 오히려 주간부 보다 야간부 학생이 더 많았다. 을지로 7가까지 전차를 타고 한양공고 앞에 도착한 대학생들이 줄을 서서 임시교사로 쓰고 있는 공고 교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는데, 교실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대학생들 미팅에 친구의 소개로 파티에 초대 받아 서울의 여대생들과 데이트도 해 보았지만 처지가 처지인지라 사투리에다 차림도 그렇고 항상 시간에 쫓기며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탓에 한두 번 만나다가는 헤어지기가 일수였다. 한번은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어여쁜 여대생 옆자리에 앉아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눈이 맞아 다음 주에 명동 다방에서 만났고 또 함께 택시를 타고 동대문 스케이트장으로 가다가 일이 또 안 되려고 해서 그랬던지 택시가 퇴계로 오르막길에서 시동이 꺼져 그냥 내려서 헤어졌는데, 며칠 후 친구와 약속이 있어서 그 다방에 갔더니 그 서울의 최고 명문 여대생은 그날도 그 다방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종수는 자신의 대학생활이 원채 여유가 없었던지라 냉정히 끝을 맺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라는 약속의 말만 남기고 냉정히 기약도 없이 쓸쓸히 헤어졌다.

 

이후에도 대학 친구들과 문학모임이나 교회와 각종 강연회 로 당시 유명랬던 함석헌, 김형석 선구자적 인물이나 철학자들의 강연회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가끔 야간부 공대생들도 총동원되어 유신독재 타도 군사정권 연장 음모를 반대하는 데모대에도 참여했고 완십리 본교생들과도 합류하여 동대문운동장 까지 진출하기도 했지만 원채 주경야독에 시간과 생존에 쫒기다 보니 극렬한 대모대의 선두에는 서지 못했다. 이때 만났던 서울의 각종 대학의 남녀 학생들과의 다양한 모임도 가져 보았는데 그중에도 어느 여름방학에 참가했던 안면도 국제 웤 캠프는 정말 아직도 잊을 수가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에 남아있다

국제웤캠프에는 세계의 젊은이들 미국, 일본 월남을 위시하여 세계12개국의 대학생 150명이 참가하여 한 달 동안 충남 서산 안면도 앞바다 한 초등학교에서 기거하며 국가에서 시행하는 구가재건 사업의 일환인 개간사업에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하며 청춘들의 뜨거운 열정을 봉사와 친교 그리고 국제협력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덧 고속버스가 언양 인터체인지를 돌아 울산으로 진입하는 시간인다. 볼륨을 한껏 높인 카세트에서는 가 김상희의 울산큰애기노래가 울려퍼진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애기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울산이라 큰애기 제일 좋대 나나도 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애기다정하고 순직한 울산 큰애기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리어 준다면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 나그래서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전구적인 공전의 히트를 한 유행가라 새삼 고향에 온 것을 실감하며 새삼 그리운 고향 아가씨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연상된다.

 

오늘에야 종수는 10년간의 서을생활을 정리하고 주경야독으로 힘겹게 서울의 한양공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이제 막 그 엣날 중학생 시절에 꿈 꾸어왔던 공단건설의 주인공이 되기위해 고향으로 돌아 오고 있다 이처럼 귀향의 부푼 꿈에 안고 장장 5시간동안 경부고속도로를 달려와 고향집에 당도한 것이다.

귀향 후 모처럼 어머니가 끓여주던 맛좋은 시락국에다 따스한 밥을 말아 먹으니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꿀맛 같은 고향의 맛을 실감한다. 다음날부터 먼저 울산공단 형편을 둘러보았다. 안타깝게도 이때쯤 울산공단의 큰 프로젝트들이 거지반 공사를 마치고 마침 지금은 거의 건설 공백 기간 이었으니, 이미 중학교를 졸업한 후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라 이미 정유공장, 비료공장이 완공됐고 석유화학 단지마저 몇몇 큰 프로젝트의 공사가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친구들도 만나보고 고향에 이곳저곳 형편을 알아보니 별신통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서울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서울에 본사를 둔 건설회사로 들어갈가 궁리하는 차재에, 그날 저녁 모처럼 고향 친구들과 모임에 함께 나온 울산 큰애기까지 어울려 울산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모나코살롱라는 가장 크고 유명했던 레스토랑에서 즐겁게 저녁을 먹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꽃을 피오고 있는데 마침 바로 옆 좌석에 덩치가 황소만한 미국인 노신사 부부가  앉아서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분들은 미국에서 울산공단의 건설현장 컨설턴트로 일하러온 기술자들이었다. 울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대부분은 정유공장이나 인근 석유화학단지의 건설현장 컨설턴트 엔지니어이거나 한미합자회사의 미국측 한국 파견 직원들이었다.

 

이날 친구가 소개한 울산 큰애기 중에는 특히 내 눈을 사로잡는 어여쁜 아기씨가 있었는데 울산 중구의 바로 이웃인 태화동에 살고 있다는데, 너무나 청순하고 수줍음이 많아 종수가 질문을 해도 무엇이 그리 부끄러운지 자꾸만 얼굴을 붉혔다. 그동안 서울의 깜찍하고 새련된 여대생들을 좀 만나보았지만 오랜만에 구향에서 이렇게 부끄러워 그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도 잘 못하는 처녀는 뭔가 좀 서울 아가씨들과는 색 다르기도 했다. 건신히 자기 소개를 하는데

제 이름이 서경순이예요하고 또 얼굴을 붉히며 미소만 짓는

이 순박한 울산 큰애기는 얼마전 석유화학단지에 준공을 한 동서석유화학 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그들의 애인이라는 또 다름 처녀와 이렇게 어울려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종수는 옆 자리에 앉은 저 외국인 부부에게도 눈길을 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 친구와 울산큰애기들 너무 아름답고 황홀한 기분에 잠겨 재미있는 이야기에 흠뻑 도취되다가 잠깐 뜸을 들리다가 또 관심에 두었던 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종수는 평소 갈고 딱은 유창한 영어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서울에서 외국인 선교사의 통역 겸 목장일을 돕고 있었으니 영어 실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신감을 가졌기에 대화는 어느덧 꿀맛 같은 울산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외국인이 지금 막 공사를 시작한 한국카프로락탐 건설현장의 미국측 감리회사의 컨설턴트 엔지니어인 미스터 알렌이라는 이름까지 알게 되었다. 점차 대화가 무르익으면서 내가 부산공고와 비록 주경야독을 하는 나이트 스쿨이긴 하지만 서울의 일류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여러 건설회사의 스카욷 제의도 마다하고, 지금은 중학생 시절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향 울산공단건설의 주역으로 참여 하고 싶어 귀향했다는 사실까지 털어놓았다.

 

이런 종수의 의향과 또 유창한 영어실력에 놀란 알렌은 어느덧 종수의 뜻 감지한 듯 함께 일할 의사를 물어보며, 지금 자신이 건설 중인 카프락탐 공장을 소개하면서  일본 유수의 치요다화공건설이 원청 도급계약자이고 H건설이 하청을 맡아 짓고 있다면서 자신이 미국 감리회사의 한국 총 감독이라며 가능하면 종수를 추천해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했다. 오랜만에 회후한 친구들과 울산큰애기의 눈총도 있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외국인에겐 며칠 후 답하겠다고 건네주는 명함을 받고 서로 헤어졌다.

며칠이 지난 후 집으로 치요다건설회사인사 담당이라면서 울산의 카프로락탐 현장에서 면접을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미 내 마음은 고향의 공단건설에 일하는 꿈을 실현 할 기회라고 결정했기에 미스터 알렌이라는 외국인과의 우연한 만남의 인연으로 하여 나는 울산석유화학단지 내에 한국카프로락탐이라는 건설현장에 건축기술자로 일하게 되었다.

 

울산 석유화학단지 내의 카프로락탐 건설 현장에 출근을 해 보니 하청 회사인 현설을 감독하는  치요다에는 종수 말고도 일본어가 능통하고 현장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고참 한국인 토목 건축 엔지니어들이 2사람 더 있었다. 당시 종수의 영어 회화도 유창했거나와 일본어 실력도 현장에서 불편 없이 쓸 수 있을 정도는 되었기에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제일 스팬()이 길다는 철골 구조인 '알미늄 살페이트' 창고 건설을 책임 맡았다. 기초 콘크리트가 완성되고 25개의 거대한 철근콘크리트 기둥이 세워지고 이제 그 위에 폭 56M의 철골지붕 구조물이 하나씩 둘씩 올라가는데 물론 임시로 엥커볼트로 조여져 있기에 15개의 H 빔 지붕틀은 모두 양쪽 끝을 데드멘(10톤 이상의 콘크리트 덩어리)에 와어어 로프(쇠줄)로 단단히 매어져 있었다. 이 철 구조물을 조립하기 위해서는 하루에도 수 십 명의 도비(일본말 위험한 공중 작업을 하는 일꾼들)들이 지상 30-40M 위에서 크레인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 아래 바닥에도 이 일을 준비하는 수십명의 인부들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12시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자 도비들도 하나씩 둘씩 바닥으로 내려와 아래에서 일하는 보조공들과 점식식사를 하기 위해 현장 식당인 한바로 향한다.

 

 일꾼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도비 반장 둘과 바닥에 크레인 장비만 무언가 마무리 작업을 하고 곧 내려 올려고 하는 찰라 갑자기 데드멘에 메어둔 와이어 로프줄이 스르르 풀려나면서 거대한 철골지붕들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하드니 마침내 서로 붙들고 있던 작은 철골들과 뒤엉키면서 바닥으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순간 번개처럼 떠오르는 생각은, 왜 누가 저 와이어로프를 함부로 풀었을까? 콘크리트 단 1루베를 타설하더라도 반드시 사전에 이 현장 건축 감독인 나에게 먼저 와서 철근이며 모든 준비사항을 단 3mm의 오차도 없이 검사를 득해야만 하는데 이번에 새로 온 건축 과장은 도대체 무모하게 그지없더니 결국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구나. 마치 지진이 일어나는 듯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을 발하기 시작했다. 현장 사무실에서 이 소리에 놀라 뛰어나온 사람들은 모두 나부터 찾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필시 이 현장의 건축 감독이 어느 구석엔가 체크를 하다가 변을 당한 줄 알았다. 그런데 잠시후 뜻밖에도 종수가 이 건물현장 반대편 끝 프랫폼 공사장 쪽에서 놀란 모습으로 불쑥 고개를 내밀고 나타난 것이었다.

 

이 불의의 사고 원인은  하청회사에 며칠 전 새로 온 현장경험이 일천한 건축과장이 경솔하게 이미 15개의 철골이 비록 완전 긴결은 되지 않았지만 가조립 되어 있으니 이젠 괜찮을 것으로 판다하고 참으로 신출내기다운 멋도 모르고 데드멘의 와이어로프를 풀게 한 것이다. 불행이도 철골과 함께 떨어진 도비반장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고 다른 도비 한사람과 크레인 운전사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날 이후 그 과장은 소리 없이 현장을 떠나가 버렸고 후일 들리는 소문에는 울산 근교에 무슨 기념탑을 세우는 현장으로 갔다고 했다. 그후 일본 치요다 본사에서 급히 날아온 역학구조 설계자의 정밀 감정을 거치고 그의 결론에 다라 몇 달간 현 건설은 다시 콘크리트 기둥의 보강 공사를 하고 25개의 철근콘크리트 기둥의 모든 앵크볼트를 다시 묻고 철골지붕을 성공적으로 조립 할 수 있었다. 그때 지은 튼튼한 철골콘크리트 구조물은 지금까지 아무 하자 없이 카프로락탐의 상징적 건물로 반세기를 넘어 제 역할을 다하며 아직도 건재하다.

 

종수는 그때 만났던 정말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울산 큰애기와 더 깊은 상랑에 빠졌다가 결혼하여 또 한국의 제2의 도약기인 중동 건설붐이 터지자 그동안 울사ᅟᅵᆫ 공단에사 경험하고 배운 전축지식과 유창함 영어실력으로 서울의 대 건설회상에 스카욷 되어 인돟네시아의 한국대사관을 건설하고 다시 중동 비행기에 올랐다. 바레인 공행에 내랴서 sodlgfdlaus zndn이트 현장으로 가는데 한국의 여름과는 다른 중동의 칙칙한 습도의 대기를 마음껏 호흡하며 오늘 하루 쉬고 내일 이면 쿠웨이트 샤외프트의 현장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아들 둘을 낳고 인명을 재천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그때 사건직후 우리 현장 직원들 모두가 보낸 종수를 향한 안도의 눈빛을 잊을 수 없고 그 안도의 숨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나는 아직 그렇게 세상을 많이 산 것 같지도 않은데 남들은 벌써 내 나이를 물어보면서 우리 나이로 70이라니까 그렇게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끝맺었지만 짧고 굵게 살았다면서 온갖 다양하고 화려한 삶을 영위하며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길고 가늘게 살면서 그냥 남들이 다 그렇듯이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만년을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울산공단을 건설한 후 지금 끝 70여년을 살아 온  종수의 인생은 어떠할까? 성공을 한 대부분의 사람이 주장 하듯이 한 우물을 꾸준히 판 것도 아니니 성공적인 삶이었다고도 할 수가 없고 학문이나 직업도 자유 분망하게 다양한 길을 걸어왔으니, 그저 인생의 폭 넓은 경험은 향유 하면서 변천하는 고향 산업수도 울산공단 건설과 해외건설의 역군으로 고향 민주화의 기수요 파수꾼으로 또 사회교육자로 이제는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며 표현의 자유와 언론창달 도모하는 자유인으로 고향의 강을 노래 부르며 살아가노라고 자위 할 수밖엔 없겠다.

 

초기 해외건설 기술·기능인들 중에 유난히 울산 출신이 많았던 것은 남보다 먼저 울산공단을 일본이나 미국에서 잣대로 통하는 국제표준건설 시방서대로 완벽하게 건설한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순방에 동행한 국내 기업들이 많은 수출 계약을 성사시키고 새로운 중동 건설 붐을 일으킬 MOU까지 체결함으로써 건설 한국의 꿈을 다시 한 번 부풀게 하고 있다.잘 알려진 대로 누적관객 수 1330만을 넘어 영화 명량과 외화 아바타에 이어 역대 흥행 3위를 기록한 영화 국제시장은 흥남부두 철수, 광부 파독, 월남 참전에 이르기까지 현대사의 단면들을 우리 국민들에게 감명 깊게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해외건설의 역군들이 열사(熱沙)의 땅 중동과 동남아 등지에서 피땀 흘려 이룬 이 나라 경제부흥의 신화도 이제 곧 영화의 모습으로 재탄생하지 않을까? 1차 오일쇼크 직후인 1974년 한국의 경상수지적자는 202270만 달러에 달했다. 1년 만에 6.6배로 불어났다. 변변한 수출품도 없었고 달러를 구해오지 않으면 국가부도는 피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한국경제를 구한 것은 해외건설이었다. 해외건설은 1970년대의 노동집약 산업의 특성을 이용한 수출 히트상품이었으며, 1980년대의 물가를 잡으면서 ‘3저 호황(원유·달러·금리)’을 누리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1976‘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불렸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은 계약금액이 자그마치 94천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정부예산의 25%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1977년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인 해외건설 노동자가 그려진 그림을 한국인이 오고 있다는 제목과 함께 표지에 장식하기도 했다. 열사의 나라에서 선진국 근로자들은 혹독한 근무조건 때문에 손사래를 쳤지만 한국인들은 돌관 작업으로 공기 내에 무엇이든 척척 해내었다. 자금력도 기술력도 열세였던 한국 건설회사가 중동시장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끈기와 개미처럼 부지런한 근면성 덕분이었다. 한국인들의 이 끈기와 근면성이라는 무기는 영어로 된 공사 시방서를 읽고 레터를 쓸 수 있게도 만들었다.해외건설 경험은 국내 고속도로, 발전소, 제철소, 댐 같은 기간시설을 짓는 데도 밑거름이 됐다. 80년대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끈 중화학공업 발전의 모태 역할도 해외건설이 해냈다. 건설사가 해외에서 수주해온 각종 플랜트 설비 공사가 국내 중화학공업 회사에 특수를 안겨줬다. 해외건설 덕에 일어선 중화학공업은 1970년대 연평균 20%에 달하는 성장률을 기록하며 80년대 자동차·전자업종 성장의 견인차가 되기도 했다. 과거 중동 업체와의 수출 계약은 주로 건설 분야에 국한됐다. 그러나 이번 대통령 순방에 맞춰 진행된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등 4개국 업체들과의 일대일 비즈니스 상담회에서 이뤄진 수출 계약은 산업플랜트, ICT(정보통신기술), 의료보건, 교육 등 다양한 분야 걸쳐 있었다.월드컵을 앞두고 있는 카타르는 1천억 달러(110조원) 규모의 월드컵 인프라 구축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이 가운데 장거리 철도(150억 달러 중 1단계 20억 달러), 일반도로 및 하수처리 프로그램(140억 달러), 도하 남부 하수처리시설(30억 달러), 크로싱 교량(60억 달러), 월드컵경기장(40억 달러) 등 총액 290억 달러(32조원) 규모의 사업은 정상회담에 힘입어 한국 기업의 참여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다. 한국경제 부흥의 원동력이었던 울산의 주력산업들이 침체 위기에 놓이면서 울산경제도 다시 어려워지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되새겨야 할 것은 어려운 기후조건을 이겨내고 피땀을 흘리며 온종일 악착같이 돌관 작업을 해내면서 모두가 불가능하다는 공사를 공기 내에 완수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중동 건설의 신화일 것이다. 울산공단을 건설했고 태화강의 기적을 이룩했던 울산의 기술·기능인들이 노련하고 숙달된 경험으로 2차 해외건설 붐’, ‘중동 건설의 신화를 다시 쓰는 날이 반드시 도래할 것이다

 

 

 

 

에필로그

 

 

 

 

국가와 자주경제재건의 원대한 구상아래 혁명정부가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기둥이 될 울산공업센터의 기공식이 36십명이란 역사의 증인들이 모인 가운데 경상남도 울산만에서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은 역사적인 울산공업지구 지정을 선언했습니다.

이어서 박(정희) 위원장을 비롯한 각 내외 인사들은 성공을 다짐하면서 기공의 첫 삽을 들고, 이어서 발파의 스위치를 눌렀는데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을 기원하는 등 발파의 폭음은 천지를 뒤흔들며 우렁차게 퍼져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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