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하구 두물머리 조개섬의 전설’

울산포스트 | 기사입력 2020/08/01 [08:19]

‘태화강 하구 두물머리 조개섬의 전설’

울산포스트 | 입력 : 2020/08/01 [08:19]

문수산 자락에 노을이 지면 붉게 물든 태화강 100리가 굽이쳐 흐르다 십리대밭을 감돌아 거대한 S라인을 그리며 깊고 푸른 용금소에 이러러 드디어 400년만에 되찾은 태화루 아래 잠시 후식을 취한다. 이제 울산만에서 동해의 넓은 가슴속으로 흘러들어가기 직전 동천강과 합수하는 이곳 두물머리 넓은 하구에는 수많은 물새 떼들이 하늘을 뒤덮고 수수만년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조개섬 삼각주에는 온종일 조개(재첩)를 캐던 조개잡이 아저씨들이 막걸리 한잔에 고단한 몸을 누이며 긴 휴식을 취하다.

 

조개섬 일명 대도선 옆으로 반세기 전 삼성 재벌 이병철 회장이 별장을 짓다가 거대한 뱀 한 마리 이름하여 용이 못 된 이무기가 나왔다가 불도저에 깔려 죽었다는 돛질산은 아직도 우뚝 솟아 있다. 산을 깍고 바다를 메우면서 울산공단을 조성한 후 어느덧 반세기를 넘어 태화강의 기적을 노래하며 지금은 사라져가 태화강 하구의 전설의 섬 이름 하여 조개섬에서 조개를 캐든 조개잡이 아저씨들의 이야기도 이제는 전설로 남아있다. 그 시절 살기 좋고 인심 좋던 울산 태화강 하구 화진마을 조개잡이 어부들은 동해바다에 닿는 울산만을 바라보며 쉴새없이 조개(재첩)를 캐든 작업을 멈추고 이윽고 조각배에 가득히 조개를 싣고 긴 대나무 장대를 밀치면서 태화강 상류로 다시 거슬러 오르며 태화고개 재첩국 전문 생산지였던 화진 마을로 찾아든다.

 

붉게 물던 석양의 태화강을 따라 태화강 용금소에 이르면 그 유명했던 재첩마을이 형성되었던 태화동 화진이었다. 태화루 아래 깊고 푸른 용금소에 이르면 이곳은 물길이 너무 깊어 명주실 한 타래를 다 풀어도 강바닥에 닿지 않는 검푸른 강심에 대나무 장대를 버리고 노를 젖기 시작한다. 1950년대 후반기 쯤 조개잡이가 가장 활발했을 때 이곳 태화 고갯마루 재첩 마을(중구 태화동 화진마을)에는 대략 십호 가량의 초가집 10채가 옹기종기 모여 철따라 사이좋게 농사를 지어며 또 여름이면 함께 조개잡이 나가는 일을 병행했다. 물론 당시 주업은 농업이었으나 그래도 철따라 부업으로 태화강에 나가 조개를 잡는 일도 생계에 적잖은 보탬이 되었다.

 

지금까지 이곳 조개잡이 화진 마을 1세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두갑(88세)씨에게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당시에는 조개잡이 배도 조개잡이 어구도 모두 마을 사람들이 손수 만들었다고 하는 데, 배를 모으는 나무 판은 읍네 제재소에 나가서 널판자를 사다가 이웃 동네에 살고 있는 목수(정성용 씨)에게 주문을 하면 우선 대략 배의 형체를 만들어주었고 그 다음 공정부터 조기잡이용 작은 조각배에 필요한 시설은 갖자 조개잡이꾼들이 직접 마련해서 완성했다고 한다. 조개잡이 배 외에도 강물 속에 들어가면 가슴까지 와 닿는 강물 속 에 들어서면 적당한 높이로 자기 키에 맞추어 조개를 캐야 했기 때문에 조개잡이 어구도 철사와 나무를 물의 깊이와 체격에 맞춰 적당한 높이로 다듬어 모두 직접 제작 했다고 한다.

 

 

이윽고 조개잡이 배가 완성이 되면 아침 8시경에 이곳 화진부락 동네 장정들이 모두 자기가 만든 조각배를 타고 줄을 지어 태화강 하구 조개섬을 향해 조개를 잡으러 나가는데, 보통 오후 1-2시가 되면 2-3말 정도의 조개를 잡았는데 당시 쌀5말이 한가마니였으니 한배에 조개 반가마니 정도 넉넉히 잡는다고 한다. 조개를 잡는 동안 물에서 온종일 일할 수는 없고 정오가 되면 잠시 이곳 조개섬에 올라가서 나와 점심식사를 했다. 미리 태화교를 지나면서 강변 주막에서 받아온 당시 맛 좋기로 부산 경주에까지 소문이 났던 유명한 울산 탁주를 한되씩 받아와 막걸리로 술도 한잔 나누며 휴식을 취했단다.

 

조개의 분포지역을 보면 당시 동해바다와 태화강이 맞닿은 곳 특히 조개섬 주변에는 각종 어족이 풍성하여 철따라 은어, 황어, 연어, 모치 등 넘쳐나고 과히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소문이 났었고 조개(재첩)도 이곳 조개섬에서 부터 태화강 상류 범서 선바위까지 강변 모래를 손으로 한 움큼씩 쥐기만 하면 “모래 반 조개 반 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조개도 풍족했다.

 

 

 

지금까지 재첩마을을 지키고 살아가는 유일의 생존자 김옹에 따르면, 아침부터 시작하여 오후 2-3시까지 태화강 조개섬 일대에서 조개를 캐고 잡은 조개를 각기 집으로 가지고 가는 양은 하루 1-2말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각자 집으로 조개를 캐 가면 아낙네들이 직접 재첩국을 끓여서 팔러 다녔던 울산 읍네 재첩동네는 이곳 태화동 말고도 돚질산 바로 아래 현재 삼산동에서도 일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신도시 삼산이 아닌 구 삼산동 주민들이 수십 가호 조개섬 너머 삼산 들녘에서 모여 살았는데, 이때 삼산에는 주로 여인들이 많이 나와 재첩을 잡았는데, 근방 모래톱에서 백합조개도 많이 잡기도 했는데 이때 채취 도구는 호미가 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조개는 첫해에 나온 것이 아주 알갱이가 적은 햇조개라 불렀고 조개섬의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조개잡이를 할 때는 주로 2-3년 생이 된 알갱이가 큰 조개들 많이 잡았고 한다.

 

일단 조개를 잡으면 집으로 돌아와 큰 가마솥에 넣고 삶아서 조개가 잎을 벌릴 때가지 푹 삶고는 그 삶은 국물은 그대고 솥에 남겨두고 조개는 껍질 체 건져서 다시 강가로 가지고 내려가서 채로 쳐서 조개껍질과 조개 알을 분리시킨다. 이 통실통실한 조개알을 다시 거두어 미리 끓여둔 가솥에 들어있는 진국에다 넣고 부초와 소금과 고춧가루를 곁들이면 맛있는 재첩국이 완성된다.

 

 

재첩마을 아낙네들이 맛있게 끓인 향긋하고 입맛 당기는 따끈한 재첩국을 이제 식지 않도록 담요를 덧입힌 단지에 담아 머리에 이고 읍네로 향한다. 늦은 봄부터 울산 읍네 거리에서 들려오던 “제첩국 사소” 하며 외치는 재첩국 장사 아줌마도 태화강의 잊을 수 없는 정겨운 소리 중의 하나였으니, 울산 토박이라면 정오가 지나면 태화고개에서 읍내로 내려오는 따끈한 해장국 중의 최고 별미인 채첩국 맛을 어찌 잊을 수가 잊겠는가?, 누구나 울산 토박이라면 값도 비싸지 않고 영양가 풍부한 서민들이 즐겨 맛 볼 수 있는 조갯국 그 들큰하고 구수한 맛과 함께 그 시절 태화강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아낙네들이 태화고개를 내려오면서 팔기 시작하여 옥교동 중앙시장까지 이르기 전에 벌써 한 단지는 동이 나는데, 당시 재첩국 한 동이를 다 팔아봐야 쌀 서너 대를 살 수 있을 정도 의 시세였다고 하니 참으로 서민 대중들 누구나 즐겨 찾던 영양식이었고 술꾼들의 사랑받던 최고의 숙취용 명품 해장국이요 진국이 분명했다.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긴 여음을 남기고 울산 읍네 전역에 울려 퍼지고 나면 태화고개 마루에서부터 신작로를 따라 성남, 옥교동 시내 쪽으로 재첩국 장사들이 줄지어 내려온다.

 

 공단건설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전설의 대도섬 “제첩국 사이소, 제첩국 사이소” 낭낭한 아낙네들의 소리를 듣던 생각만 해도 지금 군침이 돈다. 구수하고 은근하면서도 태화강과 강과 울산 동해 바다가 주는 독특한 향을 가진 재첩국과 사라져간 조개섬이 새삼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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