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윤수일과 태화강, 환상의 섬에 대하여 (1)

고향의 강과 장생포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고복수 이후 최고의 가수

울산포스트 | 기사입력 2020/06/08 [06:53]

가수 윤수일과 태화강, 환상의 섬에 대하여 (1)

고향의 강과 장생포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고복수 이후 최고의 가수

울산포스트 | 입력 : 2020/06/08 [06:53]

 -가수 윤수일과 태화강, 환상의 섬에 대하여-

 -고향의 강과 장생포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울산 병영 출신 고복수 이후 최고의 가수- 

 내가 처음 윤수일을 본 것은 서울 여의도 어느 나이트클럽 무대였다. 물론 그는 당시 혜성과 같이 나타난 국내 최고의 인기 신인가수로 공전의 히트곡인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무대 위에서 열창하고 있었고 있고 나는 두 번째 해외 건설현장인 쿠웨이트에서 막 귀국하여 동료 직원들과 회식 후 2차로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동안 내 고향 울산 출신 당대 한국최고의 인기 가수로 매우 분주하고 어려운 여건속에도 고향 친구들이 '장생포 고래축제'를 열때면 윤수일은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고향 후배들의 초청에 흔쾌히 응하여 출연료는 물론 어떤 사례금도 받지않고 행사에 참여하여 물심양면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고 들었기에 나에게는 한층 더 윤수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노래를 경청하고 있었다. 역시 무대 아래 젊은이들이 서로 엉켜 뜨겁게 춤추는 나이트클럽의 열기만큼이나 당시 가수 윤수일의 인기는 고복수 이후에 울산이 낳은 최고의 대형 가수임에는 틀림이 없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윤수일은 어린 시절부터 매우 고독하고 불운한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공군장교(칼 보룸 어케스트)와 지복희씨 사이에 1955년 울산에서 태어났으나 그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유복자였다. 1960년대까지 그러니까 울산이 공업센터로 지정되기 전까지 한적한 동해의 변방이며 농어촌이었던 울산, 그 중에서도 가장 번성한 지역이 바로 윤수일이 태어난 장생포항이였다. 이곳은 지금까지도 고래 축제가 벌어지는 고래의 고장이요 고래박물관과 원조 고래 식당들이 성업중인 곳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장생포국민학교를 중심으로 50여척의 포경선이 앞바다를 둘러싸고 있었던 울산에서 가장 활발한 어업과 교통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지역인데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 눈에 비친 포경선은 해군의 함선이나 경비정 보다 더 크고 멋있었다. 공단건설 이후 인근에 화학 공장들이 조성되면서 공해지역으로 돌변하여 주민들은 모두 강북 구시가지로 이주하게 된다. 이런 장생포항엔 일찍부터 많은 외국선박들이 정박하였고 또한 코스코라는 정유회사와 미군들도 주둔하게된다.
 
 
 
이렇듯 고래와 해산물이 풍성한 장생포에서 소문난 미녀가 바로 윤수일의 어머니였다고 지난해 100인 시민 뮤지칼 박상진의사에 함께 출연했던 울산 연극계의 원로이자 장생포가 고향인 김상일 교수는 증언해주었다. 그때 미군 청년 장교와 만나 고향 마을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었던 과년한 처녀 윤수일의 어머니는 이후 임신한 상태에서 잠시 남편과 이별을 고하며게 되는데, 그 시절 많은 주한미군이 그랬듯이 ‘곧 당신을 미국에 데려 가겠다‘는 약속을 남긴 채 윤수일의 아버지는 본국으로 갔다. 불행히도 얼마 후 그는 시험비행을 하다 추락사했기에 끝내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윤수일은 운명적으로 혼혈과 유복자(遺腹子)라는 두 가지 불운을 안고 태어나 숱한 서러움 속에 성장했을 것이다.
 
 
 
윤수일 이후 義父(의부)를 만나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울산중학교와 학성고교를 졸업했고, 울산工大에 입학했으나 고독한 소년 시절 유일한 벗은 오직「음악」뿐이었다. 당시 모두가 서울로 서울로 봇잠을 사고 떠나는 서울은 만원이라고 해도도 무두가 출세를 할려면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꿈을 키울 수 있는 서울로 가야만했고, 가수의 꿈에 부풀은 수일도 제대로 음악을 하려면 반드시 서울로 가야만 했다, 그는 대학을 포기한 채 「골든 그레이프스라는 그룹이 도우미를 필요로 한다는 신문 광고 쪽지 하나만을 집어 들고 서울행을 감행했다.
 
 
 
당시「골든 그레이프스」는 펄 벅 재단의 주선으로 신중현씨가 지휘하던 밴드였다. 1973년 윤수일이 그룹의 헬퍼로 들어갔을 때, 이미 신중현씨는 자신의 더큰 무대 활동을 위해 이곳을 떠났고 혼혈인 함중아씨가 멤버로 있었다. 함중아씨가 「골든 그레이프스」에서 나가 「양키스」란 새 그룹을 만들면서, 그 빈자리를 윤수일이 차지하게 된다. 이때까지 음악을 체계적으로 접하지 못했던 그는, 1974년 서울 망우리의 움막집에 기거하면서 본격적인 음악공부에 들어갔다. 고생하며 음악 수업을 계속해 나갈 당시 축구의 이회택 감독, 아마추어 레슬러였던 故 맹성호씨 등이 그의 유일한 후원자였다고 한다.
 
 
 
이런 모험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는 결국 당대 최고 혼혈가수로 우뚝 섰다. 어려운 시절을 음악으로 정면 돌파한 그는 가수로 명성을 얻자 이번에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사업 실패하였고 다시 가수의 길에 들어서 재기했다. 그가 다시 가수로 돌아와 새 앨범을 내놓았느데, 1999년 싱글음반 「도시의 이별」이었다. 타이틀곡인 「숲바다 섬마을」을 비롯해 모두 열 곡이 수록된 이번 「리모델링」 음반은 7년 만의 新作(신작)이다. 수록곡은 모두 자신이 직접 작사·작곡했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기다리던 너의 아파트그리운 마음에 전화를 하면 아름다운 너의목소리 언제나 내게 언제나 내게속삭이던 너의 목소리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머물지 못해 떠나가 버린 너를 못 잊어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쓸쓸한 너의 아파트
 
 
 
이 노래를 들을 때 마다 나는 그가 울산의 태화강변을 걷다가 너무나 많이 변모한 고향의 모습 그리고 다리를 건너면서 강변에 밀집한 아파트의 불빛을 보며 그옛날 동무들과 걷던 태화강변 강변 갈대밭을 회상하면서 이런 시상이 떠올랐을 것이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구름처럼 머물지 못해 떠나가 버린 너를 못 잊어 오늘도 바보처럼 미련 때문에 다시 또 찾아왔지만 아무도 없는 아무도 없는 쓸쓸한 너의 아파트
 
 
 
또 악상이 떠오르자 이 노래를 완성했으리라. 그 외 ‘환상의 섬’은 바로 고향 동네 장생포 죽도섬 지금은 선도사들이 거대한 유조선을 안내하는 높은 건물이 우뚝선 그 섬을 노래했는데 그때 기타와 함께 윤수일을 위로해준 것은 장생포 바닷가에 방파제로 연결된 아름다운 섬 죽도였다. 동백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고 바위들이 징검다리처럼 흩어져 있는 바닷가의 갯바위에 걸터앉아 윤수일은 기타를 치기도 하고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윤수일은 이곳을 너무나 좋아해 귀가할 때 일부러 죽도를 들러서 가기도 했다.
 
내고향 바닷가 가 외딴 섬하나뽀얀 물안개 투명한 바다속바위에 앉아서 기타를 퉁기며어인어같은 소녀가 음~ 내곁에 다가왔지.환상의 섬 환상의 섬 환상의 섬 소녀야나는 너를~ 잊지못해~ 환상의 섬 소녀야세월이 흐른뒤 다시찾은 그섬엔문명이 할퀴고간 초라한 그모습~보고픈 소녀는 어디론가 떠나고.....외로운 갈매기만 (음)......슬피울고 있네환상의 섬... 환상의 섬환상의 섬... 소녀야오오 나는너를 (나는 너를)잊지못해..(잊지못해)환상의 섬 (오오) 소녀야환상의 섬 (소녀야) 환상의 섬 (소녀야)환상의 섬 (소녀야)..소녀야.오 잊지못해 나는 너를(나는너를)잊지못해 (잊지못해)환상의 섬(오~)소녀야
 
1980년대 초 귀향한 나는 어느 밤늦은 시간 울산 중구 성남동 오션 호텔 커피 숍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 아니 내가 애창했던 고향 후배의 윤수일의 히트곡 ‘사랑만은 않겠어요“를 처음 접한 인연을 이야기 하면서 그의 대단한 고향 사랑과 지난 사연도 들려주었기에, 그 이야기 속에 간간이 고향의 강 바로 호텔 앞으로 흐르는 태화강에 대한 대단한 애착을 느끼게했다. 그는 ”어제 새벽에 강가를 거니는데 강에서 악취가 풍겨와 너무 놀라쑈고 실망도 컷다“고 했다. 당시 나는 3번째 이철수 칼럼을 출판한 직후라 누구보다 태화강을 사랑했던 까닭에 내 추억의 강에 대해서도 장시간의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후 나는 내가 쓴 칼럼 3권을 우편으로 그의 집으로 보내주기도 했다.
 
 
 
아마도 주소만 알았으면 내가 작년까지 쓴 시집(태화강변은 아름다워라)과 수필집(다시 찾은 태화루)도 보내 주었을 텐데 그 이후로는 통 만날 기회도 없었고 또 울산의 여러 후배들에게 물어보아도 그의 주소를 몰랐기에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다. 언제가는 다시 고향에서 만나면 그 책도 전해줄 기회가 오겠지...그리고 내가 쓴 태화강의 시편 하나를 골라 그의 곡을 붙여 노래도 불러주고 ‘사랑만은 않겠어요 이후의 최고 공전의 희트를 기록 했으면 더욱좋겠다.
 
 
 
후일 윤수일은 미국 프로풋볼(NFL) 스타 하인스 워드(30ㆍ피츠버그 스틸러스) 선수 모자의 내한 시에 "워드 모자를 보며 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과 싸우며 자란 제 성장기를 반추해봤습니다. 옛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더군요. 혼혈아를 자식으로 가진 어머니의 심정은 실의, 좌절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밑바닥 생활을 하며 아들을 올곧게 키워낸 그 어머니의 노력을 전 국민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혼혈 아동은 대부분 성장 환경이 열악한데, 그 어머니들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해 비뚤어지는 혼혈아들을 많이 봤다. 내가 클 때의 차별은 더 심했고 그래서 늘 혼혈을 떠나 내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받자는 게 인생관이었다"고 그러나 요즘 사회적인 분위기가 다문화시대로 변하면서 인식이 개선돼가는 것 같아 기쁘다고 털어놓기도 했었다
 
 
 
1970년대 후반 데뷔해서는 비애감이 가득한 낭만의 노래를 불렀고, 1980년대 들어서 록의 경쾌함을 선사했기에 팬들이 기억하는 윤수일의 노래는 뚜렷한 시차가 존재한다. 40代 후반부터 50代까지의 팬들은 「사랑만은 않겠어요」, 「갈대」, 「유랑자」, 「추억」 같은 곡의 흐느끼듯 부르는 선율을 기억한다. 30代 초반부터 40代 중반까지의 팬들은 윤수일이 선글라스에 가죽 바지를 입고 포효하듯 부른 「제2의 고향」, 「아파트」, 「황홀한 고백」 등을 떠올린다. 그는 『이미 있는 것, 흔한 것은 하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과거에는 인터뷰를 의식적으로 피해 왔지만 지금은 마음이 조금 열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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