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내 일생 처음 큰 마음먹고 써 본 처녀작 울산의 정치비화소설은 잠깐 멈추고 변모하는 세상 물정과 인심을 살펴보며 한숨 쉬어 가야겠다.
그러나 소설 쓰기를 잠시 멈출 뿐이지 영원히 정지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려고 하루 전 날 산 아래 마을에서 잠을 자고 새벽부터 험준한 산맥을 힘들여 오르다, 저만큼 한 봉우리를 넘으니 또 더 높은 봉우리를 만나게 되니 이제 최정상 천왕봉을 정복할 때까지 새로운 힘을 충전하기 위해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상 지금 나의 체험어린 진실과 약간의 허구가 가미 된 정치역사이야기(fact+fiction)를 더 이상 전개하려니 현실적 문제점에 부딪치기도 한다. 이제부터 펼쳐질 이야기들 중에는 과거 나와 한 지붕 아래서 동거하며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라는 간판 아래에서 만나, 비록 소속은 달랐지만 민주노동운동의 메카요, 동시에 기회의 땅이었던 울산의 민주화 운동의 일꾼들이 지금은 제각기 각개각층 요직을 맡아 현실 정치의 주인공이 되어있다.
과거 짓밟히고 탄압받던 인물들이 지금은 각광을 받으며 현실 정치에 참여하거나 각개 각 분야에서 지도적인 인사로 활약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처음 시작했을 때의 그 고난의 시절과 현실은 너무나 많은 변화와 괴리가 있기에 지금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를 쓰기에는 좀 더 시간을 두고 기다리며, 아직도 험난하고 더 높은 산맥을 넘어야 할 정도로,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며 휴식을 취해야 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 첫 정치 소설 1편의 에필로그를 쓰면서 여기 울산정치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이야기를 잠시 멈추기 전에, 이 사실만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하겠기에 그의 이야기를 쓰고 끝을 맺어야겠다. 지금은 이 땅에서 멀리 저승으로 떠나간 너무나 양심적인 한 착한 초등학교 교사의 진실을 밝혀야만 하겠다.
그는 병영초등학교에서 오래 근무했는데 자신의 모교(울산초등에서 3학년 때 전학)이기도 한 이곳에서 6학년 주임 교사로 있으면서 특히 작은 체구에도 이 학교 교기인 씨름부를 맡아 열과 성의를 다했으며 동료 교사들과 학부형으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받았다.
그후 잠시 울산 주전의 한 초등학교 분교장으로 나가 어린이들과 동심 속에 살다가 어느 날 친구집 개업식에 들러 한 잔 술을 들고 날이 어두어진 후에 집에 갔으나 문이 닫혀 있었다. 그가 아파트 최상층에 살고 있었으므로 평소 곧잘 문이 닫혀 있으면 그렇게 하듯 옥상에서 창문을 타고 내려오다가 그만 실족하여 바닥에 떨어져 사망하는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너무나 갑작스런 변고로 도저히 믿을수도 이해 할 수도 없었던 것은 당시 집안에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었다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도저히 믿기지도 않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지금은 이미 이승을 떠나버린 한 아름다운 교사의 양심선언 만을 기록하고자 한다.
1988년 13대 4월 총선도 끝이나고 어느덧 7월 무더운 여름이 한창 기승을 부릴 즈음에 태화강변에 위치한 성남동 내 사무실로 고향의 후배라면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아주 정겹고 가냘픈 남자의 음성이 들린다.
<이 선배님 저는 울산 초등학교의 후배 되는 병영초등교사 백광학이라고 합니다. 지난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중구 개표요원으로 참가하여 울산초등학교 개표장에서 선배님이 무더기 투표지를 보고 항의하며 개표장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을 현장에서 지켜보았고 또 집권 여당 사무국장의 요청을 받아들여 선거관리위원장이 개표를 1시간이나 중단시켰으며 집권 민정당 조직부장이라는 후배 놈이 선배님께 욕하며 대드는 장면도 보고 매우 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진작 연락 드리고 싶었는데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미루어 오다가 오늘 이렇게 친구들과 함께 선배님 이야기를 하다가 다같이 한번 만나 뵙기로 하고 감히 선배님께 전화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반갑소. 언제 한번 만납시다. 우리 성남동 사무실로 꼭 한번 들려주십시오.>
<네 그리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꼭 한번 뵙고 싶은데요. 지금 이 자리에는 모두 울산초등학교 동기들이 모여 있는데, 이 선배님을 평소 존경하는 후배들이 모여 있으니 우리가 그곳으로 찾아뵙든지 아니면 지금 이리로 좀 오실 수가 있으시면 더 좋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지요. 거기가 어디쯤 입니까?>
<예 여기는 로얄예식장 건너편에 바로 태화시장으로 내려가는 비탈진 길옆에 있는 태화루라는 식당입니다.>
<좋습니다. 마침 퇴근 시간이 다 되었고 그곳은 태화동 내 집 근방이니, 내가 그곳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첫 만남이 이루어진 후로 우리들 아니 그 중에서도 특별히 나와 백선생은 거의 일주일이 멀다하고 자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때로는 그의 어머니가 홀로 계시는 병영 집에도 가고 때로는 그의 아내가 운영하는 웅변학원의 행사장이나, 살림집이 있는 남외동 아파트에도 찾아가며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그는 나와 첫 만나는 날부터 나에게 당시 개표요원으로 참가하면서 무더기 투표가 쏟아질 때 나와 함께 부정선거를 소리치며 만천하에 고발하지 못했던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후회하면서 함께 했던 동료 교사들처럼 자신의 용기 없음을 미안해 하고 “분명히 무더기 투표를 지적했던 선배님의 주장이 옳았음”을 수차 확인하며 다른 자리에서도 자주 이 사실을 증언하며 양심선언을 하기도했다.
또 그는 항상 옛날 울산교 바로 앞 성냥공장 맞은편에 위치한 외딴 한국전력 관사에 살면서 여름철이면 동네 아이들과 울산극장 뒤편 못에서 잠자리 잡던 재미난 이야기와 한전 출장소에 책임자로 일하시던 전기 기술자였던 아버지 자랑을 자주 하곤 했다. 당시 그의 동생이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병영 동사무소 앞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전업사를 열고 있었다.
이 글을 잠시 멈추는 말미에 꼭 그의 이야기를 실은 까닭은 그래도 내가 88년 13대 국회에 출마한 이후 고향 민주화 추진운동의 기수로써 고난의 정치 노정에서 수많은 울산 읍내의 선후배들이 있고, 나도 전직 교사 출신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만났지만 그래도 그 많은 당시 울산초등학교 개표장에 선거관리위원장인 현직 판사를 위시한 교장, 교사, 공무원들이 꽉들어찬 수많은 개표 요원 중에 그만큼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않으려고 고민하면서 끝내 용기 있게 진실을 고백한 사람이 백 선생 단 한사람밖엔 없었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흐르면 어떤 때는 진실도 묻혀지고 혹 잊혀져가기도 하지만 그때 그자리를 지키며 제각기 맡겨진 임무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만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이라고 우리가 역사의 주인이라 뜻뜻이 말 할 수 있으며 새역사 창조의 견인차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만난 그날 밤 그 역사의 현장을 지켰던 유일한 후배이었기에 이미 그는 죽어서 10년 넘어 나 먼저 이 땅을 하직했지만 내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한 아름다운 사람으로 내 가슴에 남아 있기에 꼭 그와의 만남과 인연을 이 소설의 말미에 기록으로 남기고 이 글을 맺으려 한다.
백선생 그대는 작은 거인이요, 참으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소. 먼 훗날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라고 묻거든 "한 시대의 진실을 말하는 증언자였노라!"고 대답하리...
독자여러분 그동안 부족한 저의 처녀작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또 격려 해주신 점 무한 감사드립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여 울산의 정치비화 소설을 영광스럽게도 다시 쓸 그날이 올 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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