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종북주의자'들의 철 지난 투쟁

울산포스트 | 기사입력 2015/03/07 [13:48]

'늙은 종북주의자'들의 철 지난 투쟁

울산포스트 | 입력 : 2015/03/07 [13:48]

종북 운동권의 주축이 중·노년 세대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종북 성향의 시위 현장에 가보면 50~60대가 맨 앞줄에서 행동대원으로 뛰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2013년 5월 'RO(혁명조직)' 비밀회합에서 이렇게 실토했다. "지금 운동이 상당히 고령화되었다. 60대가 많지 않은가. 지난번 당(黨) 서버 탈취 투쟁이라든가, 예전에는 20대가 했는데 지금은 40대·50대가 하고 있다."

리퍼트 주한 미대사를 테러한 범인 김기종 역시 55세다. 인생 나이로는 한창 활약할 전성기지만 치기 어린 신념으로 흉기 들고 설칠 연배(年輩)는 결코 아니다. 80학번인 그는 군부독재 시절 학창기를 보낸 '486세대(40대·80년대 학번·1960년대 출생)'의 전형(典型)처럼 보인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재수(再修)를 거쳐 대학에 입학하면서 사회 모순에 눈을 떴다고 밝히고 있다. 대학생 군 체험 프로그램인 '문무대 입소' 반대 투쟁에 가담하며 군부독재에 저항했다고도 했다.

20대 시절의 그가 핵심 운동권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풍물·탈춤 같은 민중문화 활동을 했지만 눈에 띄는 투쟁 경력으로 주목받았던 기록은 없다. 1980년대에 대학 생활을 보낸 사람은 누구나 김씨처럼 사회 모순과 독재에 분노했다. 남북 분단은 미제(美帝)의 음모 때문이라 여겼고, 미군 주둔의 당위성으로 이어지는 국가안보론(論)엔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정도 차는 있을지언정 대학 시절 반미(反美)·반안보(反安保) 성향이 아니었던 486은 없었다.

김기종이 보통의 486과 달랐던 점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뒤였다. 이념에 불타올랐던 486도 세상 물정을 깨치면서 스스로의 오류를 깨달았다. 분단이 미국 탓만도 아니었고, 미국이 원수(怨讐)인 것도 아니었다. "서울 불바다" 운운하는 북한을 보면서 누가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왜 미군이 필요한지 알게 됐다. 동유럽 공산권의 몰락을 계기로 운동권 핵심들이 줄줄이 전향했다. 주사파의 대부(代父)인 김영환(52)까지 자신이 이끌던 혁명 조직의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나 김기종은 여전히 20대의 세계관을 못 버린 '박제(剝製)된 486'이었다. 그는 미국 대사를 흉기로 난자하면서 한·미 군사훈련 반대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경찰에 연행되면서도 "전쟁 훈련 때문에 이산가족이 못 만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금껏 1980년대 시위 현장에서 난무하던 흘러간 반미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의 의식 구조는 대학 시절에 멈춘 채 화석(化石)으로 굳어진 듯했다.

'늙은 종북주의자'들의 철 지난 투쟁은 김씨만의 일이 아니다. 노수희 범민련 부의장이 김정일을 조문한다며 무단 방북(訪北)한 것은 그의 나이 68세 때였다. 그렇게 평양에 가서 "이름도 그리운 우리 (김정일) 장군님"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골수 종북주의자 한상렬은 60세 때 철없는 방북 행각을 벌였다. 천안함 폭침 3개월 후에 북한에 가더니 "이명박이야말로 천안함 살인 원흉"이라고 망언(妄言)을 쏟아냈다.

중·노년층이 종북 운동권의 주축이 될 수밖에 없는 지극히 간명한 이유가 있다. 젊은 층이 가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미·반(反)자본과 착취·피착취의 철 지난 계급투쟁 노선에 동조하는 청년들은 이제 없다. 해산당하기 전 통합진보당 당원의 70~80%가 40대 이상이었다. 전교조 역시 소속 교사 중 20대 비중은 2.5%에 불과하다. 그러니 뒷방으로 물러나야 할 50~60대가 총대 메고 선봉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구조다.

김기종의 범행을 보면서 종북 운동권의 집단 히스테리를 떠올렸다. 지금 종북 그룹은 시대착오적인 패러다임으로 국민에게 외면받으며 고립되고 있다. 사람이 폐쇄 공포증을 느끼듯 집단도 사회에서 외면당해 고립으로 몰리면 과격한 히스테리 반응이 나오는 법이다.

계속 쪼그라드는 종북 세력은 언젠가 사멸(死滅)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더 폭력적이고 비정상적 행태를 보일 수 있다. 사람이 죽을 때 느끼는 최후의 고통을 단말마(斷末摩)라고 한다. 김기종의 테러에서 종북 세력의 집단적 단말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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